매체의 표상, 기억과 역사_임종명

역사는 시공간의 학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학문입니다. 어떤 역사책을 펼치던 간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언급이 있어요. 근대에 들어서 자기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 역사는 끊임없는 선택과 배제의 동시적인 과정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선택된 것을 보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은 지워지고 배제되어 집니다. 그것은 자연화 시키고 필연화하는, 선택적 기억의 체제입니다. 생산자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역사공부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나에 대한 성찰의 과정입니다. 어떤 것이던지 필요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박혁거세의 난생설화, 단군 신화같은 것은 시조들도 계속 재구성 됩니다.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 할때 단군 신화에 대해서 꼭 얘기하는데, 제주도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인가 입니다. 이 사람들은 단군 신화에 대해서 씩 웃고 말지요. 이름이 불려지면서 의미가 되듯이 표명되어지고 호명되어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역사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의도된 것들의 산물입니다. 역사화와 자연화, 필연화 작업은 가장 기본적인 근대역사학의 방법입니다. 


만들어진 나

여기있는 이 그림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상동 화백의 1948년도 그림입니다. 굉장히 권위적인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 식민지에 대한 경험이 우리가 약해서 그랬다며 아이돌 타입으로 계속 강건한 남자의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만든 아이돌 타입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보는 표준적인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만약 두 그림을 놓고 어느 것이 이순신이냐 물어보면 틀림없이 후자의 그림이라고 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이라는 기표와 이 그림이 합치되어 지면서 편안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우리의 감각조차 만들어진 감각입니다. 그 감각은 역사속에서 만들어 집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때에 그의 분신으로서 이순신이 만들어졌습니다. 군신으로서 신격화된 모습을 자신에게 전이시키고자 노력했었지요.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는 이순신 동상의 얼굴은 전혀 한국사람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4.19탑에 가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얼굴입니다. 틀림없이 사람들이 이 얼굴을 자세히 본다면 당장 바꾸자고 할 것입니다. 권력의 기획으로서 이런것들이 만들어 졌는데, 이것들은 끊임없이 균열되고 수정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견고한데 작은 충격에도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 그러면 이 사진을 한번 보지요. 이 두 사진은 북경대학의 정문이고, 그 다음 사진은 100주년 기념관 입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알았던 것이 진실을 알고 보면 범상해 지는 것은 우리가 시신경안까지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진을 보면 ‘이게 어떻게 학교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지요. 학교가는 것이 아니라 사당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굉장히 낯설고 불편했는데, 100주년 기념관을 보면서 맘이 편해졌어요. 그러면서 느낀 것이 내가 감각조차도 만들어 진 것이구나. 그 불편함의 밑바닥은 무엇일까. 자연으로 부터 멀리 되어 있을 수 록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것이다라는 생각이 내안에 만들어 진것이지요. 


식민지 시기의 여간첩 이야기 (1:27:04)

1920년대에 들어서면 대중이 탐보적 주체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탐보적 주체화라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신문에서 사회면을 보면 나오는 사건에 대해 우리는 마치 일종의 경찰이나 탐정처럼 추정을 하잖아요, 그런 것이 특히 1920년대 신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도시 중산층들이 마치 자기들이 탐정과 같은 존재가 되면서 이러한 흥미감각들이 개발되지요. 그런 형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 탐정소설설들이 많이 출판되었어요. 그러한 상황들이 1930년에 오면 15년 전쟁기, 즉 만주사변 부터 시작한 15년 전쟁기들이 스파이 이야기, 간첩 담론으로 활용 되어집니다. 방첩소설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미 중산층, 대중들은  이러한 흥미 감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반응을 했어요. 30년대에는 특히 국제간첩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간첩이야기를 통해서 끝없이 아와 타를 구분하기 위함이예요. 내국인과 외국인, 애국자와 비애국자 등 간첩 담론은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경계를 긋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타자는 항상 국제간첩으로 나타나고, 그 옆에 보조역할을 하는 얼빠진 혹은 돈때문에, 여간첩에게 액점잡힌 매국노의 모습인 간첩들이 등장합니다. 더불어 특히 누가 등장하냐면은 여간첩들이 등장합니다. 예전에 선데이 서울이라는 잡지에서 나온 ‘여간첩 마타하리'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이러한 내용이 바로 30년대 부터 나오기 시작한겁니다. 여기 슬라이드에 있는 매일 신보에서 보면은 방첩이라는 특집기사 박스안에  여간첩 마타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첩과 여성이라는 것은 민족의 문제, 젠더의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여기에 섹슈얼리티는 요즘 말로 하면 팜므파탈형의 매력적인 여성을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이런것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중생들이 치마 밑에 충기를 감추고, 유인하여 죽였다' 는 내용은 그것 또한 만들어진 내용이라는 겁니다. 나치 친위 대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레드우먼 컴플렉스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외국에 가면은 그들은 우리를 스커크 속에서 총을 꺼내 죽일거야'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의 내용이 차이있나요?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텍스트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했다는 것은 100번해도 안되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사실을 표현해보려고 한적이 없고, 또한 이것이 쓰여진 동기는 사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자체 내의 문법에 의해서 쓰여진 겁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텍스트는 그의 문법을 보여주지, 사실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텍스트를 통해서 현재를 보고 싶다면 그 균열간 지점들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트 텍스트 자체가 문제인 겁니다. 더군다나 순천여중생들의 이야기는 동네에서 금방 확인 가능한 거예요. 나중에는 그 지방 경찰들이 그런 아이가 없었다고 자백합니다. 도마뱀이 꼬리를 끊는 것처럼 나중에 가면 빨리 끊어내 버릴만큼 취약한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하는가?


*저항자의 여성화

이 사진 또한 앞의 내용이 지속되는 내용입니다. 이 사진은 이 앞쪽의 여성들이 주목 받으라고 찍은 사진입니다. 저항자를 여성화시키는 사진이지요. 왜 이런 방법을 하는가. 한편에서는 여성을 순치대상화하려고 한다는 시각이 있고, 또 한가지는 섹슈얼리티적 흥미 요소로서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미지의 소비가가 남성이라면은 저 여성의 얼굴에서 비련을 읽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두가지 요소를 끊이없이 활용합니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의 시선을 분산 시키기 위함이예요. 

*식민지하의 여간첩

*여간첩 김수임

그래서 뒷쪽에 가면 또 다른 간첩 이야기를 다룰텐데요, 지금 이 ‘여간첩 김수임'이야기와 비교하자면 그 이야기 속에서는 외국인이 나타나지 않아요. 무슨 이야기냐면요, 이 책 제목은 분명이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국제 간첩사건'이예요. 여기에는 외국인이 하나도 안나타나요. 그런데 간첩은 외국인 이여야 하거든요. 그래야지만 민족적 경계선, 즉 아와 타를 구분하기에 아주 즉자적으로 사용 할 수 있죠. 뿐만아니라 흥미성도 호소 할 수 있어요. ‘여간첩 김수임' 이야기는 이러한 부분이 딱 맞아요. 김수임과 그 내연남 베어들, 식민지 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커플을 꼽으라면 마르크스 보이와 모던걸 인데, 딱 그 현상와 맞아떨어지는 커플입니다. 김수임은 이대 영문과 출신으로 훗날 베어들과 독일로 유학까지 갔다가 결국 간첩이라는 판결을 받고 처형당하죠.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이 둘에서 난 아들이 자료를 가지고 있어요.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김수임은 간첩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앞서 말한 간첩요건에 이 사람만큼 딱 맞는 요건이 없어요. 식민지하에서 여간첩얘기는 앞서 말씀드린 민족문제와 젠더문제에 

20년대에 가장 아이돌 타입은 신여성, 즉 단발머리에 개량 치마를 입고다니는 오피스걸이예요.  그런데 3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여성들을 다시 가정에 앉혀야 하는 거예요. 가정에 들여 보낼 때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여간첩 이야기, 여자들이 직장생활하고 사회생활하면 간첩되기 쉽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도회적 여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에 여간첩 이야기를 매치시켜서 20년대때 신여성을 목표로 살았던 여성들을 다시 집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죠. 김수임은 당대 필요한 간첩이야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던 것 입니다. 여기에는 준비하지 않았지만 또 어떤 이야기가 있냐 면은, 주로 인천에서 화교들이 간첨이라고 잡혀갔어요. 화교들은 주로 간첩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습니다. 동아시아 쪽에서 붕괴된 무역체계를 통해 중국 화교들이 그 쪽을 대단히 지배하게 되어요. 식민지 시대때 경제적 납용 을 통해서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가죠. 앞뒤가 딱 맞아요. 단지 문제는 서양인이어야 하는데 같은 동양인아라는 점만 있어요.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국제 간첩사건

참 흥미로운 텍스트인데요, 이 글은 ‘국제간첩사건’이라는 김호익 경찰관의 수사기록 입니다. 여기서는 가능성까지도 드러나 있는데요. () 요즘식으로 한다면 종북을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또 000을 냈다 라는 식입니다. 

*여간첩: 월경대와 비밀문서

이 제목을 보면 대충 무슨내용인줄 알겠죠? 잡아서 수색해 봤더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 그런데 행동이 주춤주춤한게 이상해서 뒤져보니 나오더라. 다음 슬라이드의 사진의 캡션은 ‘월경대의 비밀문서를 끄집어 내고 있는 경찰'. 그런데 문제는 이게 너무 재밌다 보니 문제가 생깁니다. 김호익이라는 사람은 “이것은 애국심에서 쓰인 것이지, 간첨 탐정소설 보듯이 하지 말라"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암살당해 죽었는데요, 나중에 나온 일기에서 이 사진의 캡션은 거짓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저는 이 책을 낸 삼파출판사라는 곳의 편집장이 쓰지 않았을까 주청합니다. 자기 자신도 이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온갖 자료를 집어 넣었어요. 사진도 그렇고 온갖 기소장, 그리고 텍스트 스타일을 일기체 형식으로 합니다. 거기에는 가끔씩 로맨스 이야기도 들어가 있어요. 그런식으로 감정 이입을 계속 호소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글을 탐정 소설 보듯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합니다. 심지어는 다른 탐정 소설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합니다.  

*흥미성과 정치성 선동

그러면 왜 이러한 일들을 했어야 했는가. 대한민국 사람들을 국민화 해야하는데, 국민화라는 것이 아주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란 말이죠.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있으려고 하지, 안에는 다른 옷을 입고 도망갈 준비를 하지 원하는 데로 따라오질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흥미성에 호소를 해야되요.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균열리 생기는데, 첫 번째로 사실성이 약화되어지고 텍스트성이 취약해 집니다. 또 한 가지는 흥미적 요소의 몰두로 대중의 정치적 포섭력이 약화됩니다. 원래의 목적인 정치선동은 보지않고 재미로만 읽게 되는 거죠. 원래의 하고자 했던 목적은 정치적 포섭을 위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소설로만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간첩 이야기에 끊임없이 개입해서 환기 시키는 거죠.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그럼 이러한 균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거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의 하지 않는 부분을 그 사람들에게 승인 시키고자 했던 부분, 오히려 이 균열들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텍스트 자체가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균열 지점들이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보고 싶다면 균열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사실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법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서 말씀드렸던 (*대중 포섭(3): 대중의 흥미 감각의 호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사회적으로 우리가 가장 쉽게하는 발언은 ‘그거 뻥이야, 나중에 실제로 보니까 이거였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저항자를 여성화시키고, 그들을 순치 대상으로 만들고, 다시 가정으로 들여보내는 과정은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언제든지 정복되어 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한 현실들은 강건한 현실이 아니라 취약하기 그지없는, 국가라는 당당한 기구가 기껏 탐정소설에나 의지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얄팍한 모습이 대한민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드러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아마도 (순천여중생들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건이 그 지점에서 해석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국/ 식민지 질서의 붕괴와 여성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국가주의적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여, 젠더적 이야기를 추가로 할까 합니다. 이 사진을 보면 1945년 11월 부산에서 찍은 피난민의 모습입니다. 제국이나 식민지 질서가 붕괴되고 와해되어 졌을때 주도적 가족의 담당자는 여성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의미에서도요. 남성은 정규직장에 맞춰서 훈련받았고, 여성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규적 직장에 많아요. 그러니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이 잘 할수밖에 없어요. 여성은 정규적, 공적 산업체계가 붕괴되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요. 

*해방과 능욕 당하는 남성

반면에 남성이라는 존재는 그런 상황에서 능욕당하는 존재입니다. 이 그림은 반북선전잡지 라는 책에 있는 삽화입니다. 이 삽화의 내용은 한 남성이 갈마반도에 피서갔다가 짐승같은 소련 여성에게 강간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기본적인 초점은 반공 반소입니다. 이러한 똑같은 플롯의 이야기가 남한에서도 나오는데, 한 남한의 신문기자가 미국 여군에게 능욕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땅의 남성중심 정치가 무엇으로 끝났죠? 식민지로 끝났습니다. 식민지가 끝나고 나서는 또 양군에 의해서 지배받는 상황이 되었죠. 

*여성 타자화와 남성 중심 질서 재구축

이런 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슬라이드 그림을 가리키며) 이 그림은 이응노 화백이 그린 1946년 ‘거리풍경'이라는 그림입니다. 양공주 여성이 지나가고 있고 주변 사람들은 질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 여성을 가정으로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가족 국가화입니다. 우리 민족의 조상은 누구죠? 보통 국조라고 하죠, 단군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자 그럼 국부는 누구죠? 지금 우리는 홀어머지 밑에 있지만,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국부는 이승만이라고들 했습니다. 할아버지 만들고, 아버지 만들고, 그 다음 나머지 국민들은 그 자식이 됩니다. 실은 개천절은 민족(대한민국)을 표상하기 위함입니다. 또 한가지는 젠더적 문제에서 여성들을 재배치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부계중심의 확대가족 구성 속에서는 여성들은 의미없어요. 단군의 부인이 누구죠? 이런 구성속에서 부인이 누군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웅의 부인은 웅녀, 하지만 단군의 부인은 없어요. 이러한 것이 민족국가의 표상화 전략이고, 젠더에 대한 전략입니다. 제국 식민지 체제가 되면서 남성들의 권위가 실추되고, 그것을 대체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다시 가정으로 밀어넣는 과정입니다. 이응노 화백의 그림은 ‘저런 양공주들...’정도로 투덜거리는 정도 인데, 아까 국조, 국부의 내용은 가족 국가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사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순천 여중생들의 이야기는 젠더의 문제로까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의 텍스트 분석은 소비자인 대중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텍스트 분석을 제데로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실제의 예를 들어 흥미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쓴 글의 제목은 ‘흥미로운 간첩이야기와 위태로운 정치 선동'입니다. 그리고 그 균열들이 일어난 것은 ‘이와 같은 국제 간첩의 모습을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의 000에 구체적인 현실의 대중에게 최상적인 존재인 국가의 의제라 흥미롭게라도 선전선동해서 그들을 끌여 들여야 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태로운 국제 간첩의 모습은 수립적인 대한민국의 진상이었다.’ 여기서 진상이라는 말은 진짜 모습이라는 한자어를 붙였지만 조롱하듯이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얘기의 끝인것 같습니다. 

HANGJUN LEE